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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서울의 어느 경찰서에서

끄적끄적

by 영상기자 2022. 7. 14.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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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내용은 일반적인 상황을 가정하여 쓴 픽션으로,
특정한 사건/인물/장소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2010년 12월 00일 서울 ㅇㅇ경찰서

오늘은 주택가에 도박장을 개설해 수백억 대의 불법 사기도박을 벌인 범인이 잡혔다는 내용을 취재하러 왔다.


브리핑 시간은 10시지만 미리 도착해 증거품을 훑어본다. 테이블 위에는 범행에 사용했던 카드와 화투, CCTV와 고객 명부 등 각종 증거품들이 깔려있다. 나보다 먼저 도착한 A선배가 스케치를 하는 동안 뒤에 서서 어떤 컷들을 만드는지 유심히 지켜본다.

 


' 오 저 구도로 찍으면 괜찮겠는데.. 나도 이따가 해봐야지.'

 


그냥 사이즈와 방향을 바꿔가며 툭툭 찍어내면 5분이면 끝날 일이지만, 선배는 아주 공들여 촬영을 하고 있었다.

증거품을 던져보기도 하고, 뒤에서 조명을 쳐서 역광으로 연출을 하고, 종이를 한 장씩 넘겨서 보여주고, 오디오맨을 시켜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는 것 같다. 이런 연출을 통해 정적인 화면을 조금이나마 역동적으로 만들어 보여주는 것 또한 영상기자의 역할이다. 그런데 나는 마음이 조급하다. 다른 회사 기자들이 몰리기 전에 나도 스케치를 좀 해야 하는데. 10시 브리핑 시작하기 전에 스케치를 미리 해둬야 마음이 좀 편한데..

"음료수 하나 드세요."

내 조급함이 느껴졌는지 형님이 박카스 한 병을 따서 내민다.

"아, 형님 이따가 피의자 꺼내 주시나요?"

피의자가 카메라 앞에 서는 걸 극도로 꺼려 한다는 얘기를 취재기자를 통해 이미 들은 터라 확인차 물어보았는데, 형님이 어찌어찌 설득을 하신 모양이다. 대신에 너무 오래 붙잡고 있지는 말아 달라고 당부를 하신다.


10시 브리핑 시간이 되자 6개 방송사 영상기자들이 다 모였다. 

일찍 온 덕에 가운데 자리를 잡아서 좋아했는데 웬걸. 경찰 독수리 마크가 양쪽 어깨 뒤로 딱 걸려 마치 천사의 날개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그림이 영 어색하다. 중간에 자리를 옮길 수도 없고.. 다음에 ㅇㅇ서에 오면 센터에서 조금 비껴난 곳에 자리를 잡아야겠다고 머릿속에 메모를 해둔다.

브리핑이 어느 정도 끝나고 질의응답이 이어지고 있다. 중요한 싱크는 어느 정도 나온 것 같아, 한 바퀴 돌며 스케치를 했다. 아직은 어느 타이밍에 빠져서 스케치를 해야 할지 확신이 없어서 선배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눈치껏 움직이고 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이따가 증거품 스케치를 어떻게 할지 계속 구상 중이다. 영상으로 '야마'를 잘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고 선배들에게 지적을 받은 게 자꾸 신경이 쓰인다.


브리핑이 끝나고, 증거품 스케치를 시작하기 전에 퀵 서비스를 먼저 불렀다. 

12시 뉴스에 단신을 내보내려면 짧게라도 회사에 영상을 보내야 한다. 퀵서비스가 도착하기 전에 풀샷과 중요한 몇 컷을 먼저 촬영해 테이프를 회사로 보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구상해 두었던 컷들을 또박또박 완성해 나가는데, 기다리는 선배들이 뒤에서 쳐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괜히 긴장이 된다. 나는 초보가 아니다 하고 보란 듯이 선 건(Sun gun)으로 조명도 쳐보고, 핀뽑기도 하고, 매크로도 걸고, 할 수 있는 온갖 기술을 동원해 그림을 만들어 냈다.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겨울인데도 땀이 뚝뚝 떨어진다. 반면에 선배들은 아주 여유가 넘쳐 보인다. 선배들에게는 수년째 매일 반복하는 일이니, 여유가 넘치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겠다.

서울 어느 경찰서
사진에 나오는 장소/인물은 글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드디어 피의자 스케치 시간. 점퍼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수갑에는 수건을 두른 피의자가 슬리퍼를 끌고 걸어와 형님 책상 앞에 앉았다. 6명의 영상기자가 서로의 앵글을 침범하지 않으며 분주히 스케치를 완성해 나간다. 모두 어느 정도 스케치를 한 것 같으니 현장에서 제일 선임인 B 선배가 '이제 인터뷰하시죠'라고 현장 정리를 해 주었다. 오디오맨들이 일제히 피의자 앞에 와이어리스 마이크를 갖다 둔다. 이어지는 취재기자의 질문에 피의자는 '죄송합니다' 한마디 외에는 묵묵부답이다. 더 이상 진전이 없을 것 같아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철수를 결정했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가까운 김치찌개 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갔다. 

밥을 먹다 보니 늦게 온 B 선배가 증거품 스케치를 마치고 들어오셨다. 자연스레 합석을 하고, 선배가 밥도 사주셨다. 나도 나중에 후배들을 만나면 밥을 사주는 멋있는 선배가 되어야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먼저 현장으로 가셨나 보다. 현장 스케치와 스탠드 업을 먼저 하고 식사를 하실 생각인 것 같았다. 먼저 도착한 기자들이 현장을 들쑤셔놔서 늦게 가는 경우에 취재가 힘들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기에 신경이 쓰였지만, 다행히 잘 마칠 수 있었다.

퇴근시간이다! 부장의 퇴근 지시를 기다리며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다가온 C 선배.

"저녁 약속 있냐? 저녁이나 먹고 가자."

저녁식사는 핑계고 목적은 역시 술이다. 갈매기살을 구워가며 소맥을 비우는데 TV에 오늘 다녀온 아이템이 방송되고 있다.

B 선배가 제작한 리포트였다. CCTV 모니터 화면에 등장한 취재기자가 멘트를 시작한다. 거기서 줌아웃을 하며 기자가 등장하는 화면 구성. 주택가에 위치한 도박장에서 CCTV로 외부를 관찰하며 불법 도박을 일삼았다는 멘트와 찰떡이었다.

나는 생각도 못 한 시도였는데..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다.


고기를 집어먹으려던 젓가락을 내려두고, 술잔을 거칠게 비워냈다. 술맛이 쓰다.


서울의 어느 경찰서
사진에 나오는 장소/인물은 글의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아덴만 여명작전(삼호주얼리호 피랍사건) <1>

2011년 1월, 당시 출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초대형 항공기, 에어버스 A380을 타고 간 첫 중동 출장지 오만. 여러 가지로 기억에 많이 남는 출장이었다. 그동안 해외에서 벌어진 사건사고는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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